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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캔버스 위로 튄 파란 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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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캔버스 위로 튄 파란 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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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et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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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잿빛 캔버스 위로 튄 파란 물감

나는 동화를 그린다. 하지만 내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작가님, 이번 주인공 표정이 너무 우울해 보여요. 채도 좀 높여주세요. 아, 그리고 마감, 내일 오전인 거 아시죠?]

작업을 의뢰한 클라이언트의 메일은 건조했다.

타블렛 펜을 쥔 손목이 시큰거렸다. 모니터 속의 세상은 알록달록한 파스텔톤 꽃밭인데, 6평짜리 내 자취방은 온통 무채색이었다. 빨래 건조대에 널린 회색 양말, 며칠째 쌓여있는 편의점 도시락 용기, 그리고 꺼버린 모니터 화면에 비친 푸석한 내 얼굴.

더 이상 그릴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떤 색을 써야 할지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도망치듯 슬리퍼를 끌고 밖을 나와 찬바람을 가슴 깊이 마셨다. 그리고는 무작정 서점으로 들어갔다.

종이 냄새. 활자가 담긴 책을 보면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베스트셀러 코너의 '힐링 에세이'들은 뻔한 위로만 건넸고, 자기계발서들은 더 열심히 살라며 당근없는 채찍질만 해댔다. 갈 곳을 잃은 시선이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기술/취미' 코너로 흘러갔다.

복잡한 회로도, 딱딱한 코딩 용어들이 적힌 책 사이에서, 유독 이질적인 책이 눈에 들어왔다.

<메타파일럿>

제목보다 먼저 시선을 뺏은 건 표지의 그림이었다. 기계 장치에 0과 1로 도배한 그런 표지가 아니었다. 조종석 우측 창문 너머로 보이는 비행기 한대가 가슴 시리도록 푸른 수평선 위를 날고 있었다.

순간,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뇌리에 스쳤다. 열 살 무렵, 가족 여행 때 탔던 비행기. 모두가 잠든 사이 손거울같은 창을 통해 보았던 그 풍경. 땅 위에 어지럽게 얽힌 도로나 건물은 한 점이 되었다가 사라지고, 오직 하늘과 나만 존재하던 그 고요한 세상. 스튜어디스가 되어 매일 저 풍경을 보겠다던 꿈은 입시와 취업이라는 난기류를 만나 산산조각 났었다.

지나치듯 걷다가 책을 집어 들었다. 책장을 넘기자 "당신의 방을 비행기로 만들어 세계를 여행하세요."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내 방을 비행기로 만들어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고?"

"그래, 이거라면... 다시 그릴 수 있을까? 저 구름 너머의 색깔을..."

지금 당장 구름너머의 세상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내 인생은 영영 회색빛으로 남을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이것은 충동결정이 아니었다. 내 무의식이 보낸 Mayday에 대한 응답처럼 느껴졌다.

"내 비행기로 세계 여행을? 재밌겠다... 훗"

그렇게, 나의 무모하고도 엉뚱한 VR 비행이 시작되었다.


 
게시됨 : 04/12/2025 5:29 오후
(@plet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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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검은 물건과 PC방 사장님.

현관문 앞에 놓인 택배 박스는 생각보다 컸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주문한 건가?

"자, 이제 날아볼까?"

설렘을 가득 안고 상자를 동봉한 테이프를 커터 칼로 잘랐다. 하지만 상자가 열리는 순간, 내 기대감은 순식간에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검은색 플라스틱 덩어리 두 개 - 나중에 알았지만 하나는 조종간, 다른 하나는 러더라고 했다 - 똬리를 튼 뱀처럼 솟은 물건과 걷기 운동하는 스텝퍼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미학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기계 장치류처럼 버튼과 스위치가 여기저기 달린 비주얼이었다.

[System Requirement: DirectX 11, USB 2.0 port required, Driver installation...]

"다... 다이어트? USB 2.0은 또 뭐야? 노트북에 연결하는 구멍이 다 똑같이 생긴 거 아니었어?"

A4 한장에 그려진 설명서와 내 노트북에 뚤린 여러 구멍을 번갈아 쳐다보며 '맞는 그림 찾기'를 시작했다. 대충 맞다 싶은 구멍을 찾아 넣었다. 그리고는,  QR코드를 찍은 영상을 따라하며 책상 위에 조종간을 올리고 발 아래에는 러더를 놓았다.

휘이이이윙-

노트북 팬이 굉음을 내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모니터 속의 비행 화면은 자주 끊기고 결국 비행을 멈췄다.

"아, 안 돼!"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비행은 커녕, 일러스트 작업 노트북이 고장날 것 같았다.

나는 멍하니 검은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동네 어귀에 있는 간판 하나를 떠올렸다.


이 게시물은 1개월 전에 GGsF 님이 수정했습니다.
 
게시됨 : 04/12/2025 5:30 오후
(@plet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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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타늄 PC방

PC방 문을 열자 라면 냄새와 화려한 LED 광선이 눈을 찔렀다. 카운터 안쪽에는 숏컷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여자가 드라이버를 입에 문 채 컴퓨터 본체를 뜯고 있었다.

"저기... 사장님?"

그녀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라면 주문은 키오스크 이용하세요. 자리 없으면 대기하셔야 돼요.]

"아니, 그게 아니라요..."

나는 쭈뼛거리며 쇼핑백에서 조종 스틱을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덜그럭. 둔탁한 소리가 나자 티타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과 조종 스틱, 그리고 내 품에 안고 있는 노트북을 빠르게 오갔다.

드라이버를 내려놓은 그녀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호오? 멋진 조종간이네요? 비행기 게임을 하려고요?]

"아, 네! 이걸... 제 노트북에 연결하니까 화면이 꺼져서..."

노트북 수리를 맡겼을때 가끔, 타이탄 PC방을 이용했던 나는, 도움을 바라는 심정으로 노트북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노트북을 열어보지도 않은 채, 물끄러미 내 노트북을 보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손님. 지금 이 예쁜 쓰레기로 비행시뮬레이션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네? 예쁜... 쓰레기요?"

[이건 노트북이 잖아요. 고사양 노트북이긴 하지만 내장 그래픽 카드로 비행시뮬레이션을 하겠다니 어림도 없어요.]

"그, 그럼 어떡해요? 큰맘 먹고 가입해서 비행교육을 신청했는데..."

울상이 된 나를 보며 티타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는 카운터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앞에 툭 던졌다. 컴퓨터 카탈로그 였다.

[일단 앉아요. 비행기 띄우기 전에 활주로 공사부터 먼저 해야겠네요. 노트북은 안되고 게이밍 컴퓨터가 있어야 해요]

그녀의 눈빛이 푸른LED 광선에 비쳐 또 한번 번뜩였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 아니, 다짜고짜 조종 장비를 쇼핑백에 들고온 일러스트 예술가를 보는 엔지니어의 애정섞인 눈빛이었을지 모른다.

"컴퓨터를 새로 사야하나요?“ 나는 불가능하다는 질문을 그녀에게 던졌다.

[아니요. 옵션을 타협하면 새 컴퓨터가 없어도 할 수 있어요]


 
게시됨 : 04/12/2025 5: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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