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야생마 등 위에 올라타다
 
알림
모두 지우기

야생마 등 위에 올라타다

1
1 사용자
0 Reactions
17 보기
(@pletcher)
글: 63
Estimable Member
주제 스타터
 

[Part 1] 예민한 야생마 길들이기 (BF-109 G2)

[Chapter 1] 야생마의 등 위에 올라타다 (이륙과 토크)

시뮬레이션 로딩 바가 100%가 되자, 익숙했던 바탕화면 대신 칙칙한 회색 구름이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는 검은 연기 기둥이 피어오르고 얼어붙은 동토의 땅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와... 분위기부터 다르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곳은 관광지가 아니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잔혹했던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레이 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낮게 깔려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카야 님. 이제부터 우리는 하늘을 여행하는 비행사가 아닙니다. 1942년, 프로펠러 하나에 목숨을 걸고 하늘을 날았던 그들의 세계로 들어온 겁니다. 낭만도 있었지만 동시에 가장 처절했던 시대죠."

비장한 BGM이 깔리는 듯했다. 나는 유튜브 카메라를 보며 진지하게 멘트를 날렸다. "여러분, 들리시나요? 이 엔진 소리, 아니... 역사의 소리가?"

1. 세스나는 잊어라

"자, 여러분. 카야 파일럿, 드디어 전투기 탑승합니다!"

나는 비장하게 엄지를 치켜세우고 VR 헤드셋을 썼다. 로딩 화면이 지나고 눈앞에 메서슈미트 BF-109 G2의 칵핏이 나타났다.

"으..."

숨이 턱 막혔다. 세스나 152의 칵핏이 아담한 세단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강철로 만든 감옥 같았다. 시야는 좁았고, 사방이 투박한 금속 파이프와 알 수 없는 독일어 라벨 Achtung!이 붙은 계기들로 꽉 차 있었다. 무엇보다 기수가 높게 들려 있어서 정면의 활주로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레이 쌤!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요? 의자 좀 높여주세요!"

헤드셋 너머로 레이 쌤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카야 님, 이건 테일 드래거(Tail-dragger) 방식으로 만들어진 비행기라서 그래요. 지상에서는 안 보이는 게 정상입니다. 지그재그로 가면서 앞을 봐야 해요."

"아니, 앞도 안 보고 어떻게 달려요?"

"일단 시동부터 걸어보죠. 세스나랑 소리부터 다를 겁니다. 그리고 이번 훈련부터는 러더 페달 써야합니다."

나는 조종간의 자동 시동 버튼을 꾹 눌렀다. 마그네토 스위치가 켜지고, 끼릭, 끼릭, 끼릭... 프로펠러가 무겁고 천천히 돌아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기체가 요동치며 폭발적인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앙-!

"으악!" 귀가 찢어질 듯한 엔진 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1,475마력. 세스나(110마력)의 13배가 넘는 힘이 내 엉덩이 밑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2. 죽음의 회전목마

"좋아, 쫄지 마. 카야. 넌 수료증 있는 여자야."

나는 심호흡을 하고 스로틀을 쥐었다. 활주로를 달리다가 속도가 붙으면 당기면 되겠지?

"가자! 풀 파워!"

나는 망설임 없이 스로틀을 끝까지 확 밀었다. 그 순간, 세상이 뒤집어졌다.

부아아앙-!

비행기가 앞으로 나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기수가 왼쪽으로 홱 돌아갔다.

"어? 어어?! 왜 이래!"

나는 당황해서 조종간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하지만 비행기는 내 의지를 무시하고 미친 듯이 왼쪽으로 급회전하더니, 활주로 옆 풀밭으로 처박히며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날개 끝이 땅에 긁히며 흙먼지가 치솟았다.

[CRASHED]

화면에 뜬 붉은 글씨. 이륙 시작 3초 만의 참사였다.

3. 범인은 '토크(Torque)'다

"하하하! 카야 님, 방금 팽이 치기 하신 거예요?"

레이 쌤이 박장대소했다. 나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따졌다. "아니, 갑자기 왼쪽으로 돌잖아요! 이거 고장 난 거 아니에요?"

"고장이 아니라 과학 입니다. 카야 님, 선풍기 강풍으로 틀면 모터가 덜덜거리는 거 보셨죠?"

"네, 봤죠."

"그 순간 힘이 토크(Torque) 예요. 프로펠러가 시계 방향으로 세게 돌면, 그 반작용으로 비행기 몸체는 반시계 방향으로 돌려고 하거든요. 세스나는 힘이 약해서 괜찮았지만 이 녀석은 엔진 힘이 엄청 세서, 스로틀을 확 밀면 기체가 그냥 돌아버려요."

레이 쌤은 화면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걸 잡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해요. 첫째, 스로틀은 천천히 밀 것. 둘째, 오른쪽 러더 페달을 적극 사용할 것."

"오른쪽 러더 페달을 적극적으로 쓰라구요?"

"네. 기체가 왼쪽으로 머리를 틀려고 할 때마다 오른쪽 러더를 차서 방향을 똑바로 잡아줘야 해요. 이륙은 발로 하는 거예요."

4. 탭댄스를 춰라

다시 활주로. 이번에는 전략을 바꿨다. 나는 발밑의 러더 페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천천히... 천천히..."

스로틀을 아주 조금씩 밀었다. 엔진 소리가 커지면서 기수가 슬금슬금 왼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지금이야!'

오른발 러더를 살짝 살짝 찼다. 기수가 다시 정면으로 돌아왔다. 출력을 더 높이자 다시 왼쪽으로 쏠리는 힘이 강해졌다. 나는 오른발을 더 깊게 밀었다.

"좋아요! 그렇게 발로 활주로 중앙을 유지하면서 속도를 올려요!"

야생마는 비틀비틀 술 취한 사람처럼 움직였지만 이번에는 풀밭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속도계가 150km/h를 넘어서자 꼬리 바퀴가 들리며 시야가 트였다.

"보인다! 앞이 보여!"

"계속 달려요! 땅에서 뜰 때까지 긴장 풀지 마요!"

마침내 기체가 붕-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조종간을 살짝 당기자 덜컹거리던 노면의 진동이 사라지고 매끄러운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떴다... 떴어!"

식은땀으로 젖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세스나의 이륙이 드라이브 였다면, BF-109의 이륙은 야생마의 등 위에 올라타 버티는 '로데오' 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카메라를 향해 소리쳤다. "봤죠? 백구(BF-109) 이륙은 이렇게 하는거에요!"

나는 컴퓨터를 끄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이렇게 위험한 비행기를 몰고 하늘을 날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BF-109 에이스 조종사들도 이륙에서 살아남으면 전투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며 신참들을 격려 했다고 한다.


이 주제는 4주 전 6 회에 GGsF 님이 수정했습니다.
이 주제는 3주 전에 GGsF 님이 수정했습니다.
 
게시됨 : 18/12/2025 6:18 오후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