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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메타파일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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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메타파일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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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et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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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격표 앞의 좌절

"와... 이거 가격 실화야?"

인터넷 쇼핑몰 장바구니에 담긴 조종 스틱과 러더 페달의 합계 금액을 보고 나는 뒷목을 잡았다. 쓸만하다 싶은 건 내 한 달 생활비를 훌쩍 넘었고, 싼 건 장난감처럼 조잡해 보였다.

"티타 님... 그냥 키보드로 날면 안 될까요? 화살표 키로도 비행기는 움직이잖아요."

PC방 카운터에 엎드려 징징거리는 나를 보며 티타가 혀를 찼다.

"헐... 게임도 아니고 시뮬레이션 비행을 키보드로 하는 건, 피아노를 마우스 클릭으로 치겠다는 거랑 같아요. 게다가 VR을 쓸 거라면서요? 눈 가리고 키보드 키를 찾다가 추락할거에요"

"그치만 너무 비싸잖아요! 취미 생활 하려다 파산하게 생겼다고요."

나의 절규에 티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카운터 아래에서 투박한 갈색 종이 상자를 꺼내 올렸다.

"그래서 준비했죠. 메타파일럿 스페셜 에디션."

#2. 투박하지만 완벽한

상자에서 나온 물건은 시중에서 보던 매끈한 플라스틱 제품과는 달랐다. 표면에는 세로줄 무늬가 은은하게 보였고, 색상은 검은색과 짙은 회색이 섞여 있었다. 뭔가 공장에서 찍어낸 게 아니라, 공방에서 깎아 만든 듯한 느낌.

"이게 뭐예요? 어디 브랜드 건데요?"

"브랜드는 무슨. 내가 직접 만든 거예요. 3D 프린터로."

"네? 3D 프린터요? 그럼 플라스틱 장난감 아니에요?"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조종간(Stick)을 쥐어보았다. 그런데... 어라?

착- 손에 감기는 그립감이 놀라울 정도로 묵직하고 단단했다. 엄지손가락이 닿는 곳에 버튼이, 검지가 닿는 곳에 트리거가 정확하게 위치해 있었다.

"어? 생각보다 느낌이... 진짜 쫀득한데요?"

"그렇죠? 시중 제품들은 기종에 특화되거나 버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거든요. 근데 이건 시뮬레이션 비행훈련을 위해 범용으로 설계했어요. 눈 감고도 손가락 감각만으로 모든 버튼을 찾을 수 있게."

티타는 러더 페달도 무겁게 꺼내 보여주었다. 철물점에서 봤던 튼튼한 프로파일과 스프링과 볼트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내 눈엔 미적 감각을 잃은 공대생이 만든 기계장치로 보였지만, 묘하게 '훈련에 꼭맞는 장비'라는 느낌이 들었다. 기초 과정에서 러더는 필수 장비는 아니라고 했다.

#3. 커스텀, 그리고 오픈 소스

"그리고 이 장비의 매력은 이거예요."

티타가 조종간 헤드 윗부분의 뚜껑을 딸깍 열더니, 버튼 뭉치를 쑥 뽑아냈다.

"비행기마다 버튼 위치가 다 다르거든요. 세스나 탈 땐 이렇게 두고, 나중에 혹시 모르겠지만 전투기 탈 일 있을땐 미사일 발사 버튼이 있는 모듈로 바꿔 끼우면 돼요.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이 가능하죠."

"와, 변신 로봇 같아요!"

"부품들도 구하기 쉬운 것들로 설계했고. 제작 영상도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고요. 킷트(Kit)를 구매해서 카야 님 컬러의 독특한 조종간을 집에서 뚝딱 만들 수 있어요."

"아, 저는 기계치라 만드는 건 좀..."

내가 손사래를 치자 티타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팜플렛을 내밀었다.

#4. 100대 한정의 유혹

[메타파일럿 공식 훈련 장비 대여 서비스] 100대 한정 제작 / 선착순 마감 임박

"직접 만들기 힘들거나 고가의 장비를 보고 굳이? 하는 훈련생들을 위해 딱 100대만 뽑아놨어요. 커피 한 잔 값이면 이 풀세트를 빌려드려요."

내 귀가 팔랑거렸다. 수십만 원을 주고 사는 건 부담스럽지만, 커피 한 잔 값이라면? 게다가 VR에 최적화된 맞춤형 장비라니.

"지금 대기자 명단 보니까 97번까지 찼던데... 카야 님, 고민할 시간 없을걸요?"

"할게요! 저 98번 할게요! 지금 당장 신청하면 되죠?"

나는 티타가 내민 태블릿 PC에 번개처럼 서명했다. 100대 한정이라니, 이건 못 참지.

티타가 만족스러운 듯 내 어깨를 툭 쳤다.

"탁월한 선택이에요. 이 장비, 겉모습은 투박해도 성능은 수백만 원짜리 못지않거든요. 이제 장비 탓은 못 하겠네요?"

나는 묵직한 조종간을 품에 안았다. 차가운 플라스틱의 감촉이 아니라, 누군가가 비행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설계한 '열정'의 온도가 느껴지는 듯했다.

"좋아.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 더 가보자 이걸로 저 하늘을 다 뚫어주겠어!"


이 주제는 1개월 전에 GGsF 님이 수정했습니다.
 
게시됨 : 06/12/2025 12:32 오후
(@plet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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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timable M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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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5] 비밀의 문 뒤에는 괴물이 산다

#1. STAFF ONLY

대여 신청을 마치고 반품할 쇼핑백을 들고 나가려는데, 티타가 나를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무거운거 들고 왔다 가기 전에, 진짜를 한번 보고 가시죠."

"진짜요?"

티타는 카운터 뒤쪽에 있는 철문으로 향했다. 낡은 문에는 'STAFF ONLY /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붉은색 팻말이 붙어 있었다. 나는 라면 재고 창고나 장비실이겠거니 생각하며 그녀를 따라갔다.

티타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자, 철커덕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서 와요. 나의 성역(Sanctuary)에."

#2. 바이퍼(viper), 잠에서 깨어나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는 서늘한 공기속에서 독특한 기계 냄새가 났다. 금속과 기름, 그리고 전자 회로의 냄새.

티타가 벽면의 스위치를 올렸다.

탁, 타닥-

천장의 레일 조명이 순차적으로 켜지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곳은 창고가 아니었다. 작은 격납고였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 거대한 '괴물'이 웅크리고 있었다.

"이게... 뭐예요? 로봇이에요?"

그것은 단순한 컴퓨터 책상이 아니었다. 둔탁한 무광 회색으로 도색된 금속 프레임, 복잡한 계기판과 스위치들, 그리고 그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네 개의 굵은 유압 실린더와 모터들.

오래전 영화에서 보았던 전투기 조종석이였다. F-16 파이팅 팰콘(Fighting Falcon)의 칵핏이라고 했다.

"제 보물 1호예요. 실제 F-16 조종석 규격이랑 1:1로 똑같이 만든 홈 콕핏(Home Cockpit)이죠. 바닥에 모터 달린 거 보이죠? 비행 움직임에 맞춰서 시트도 같이 움직여요."

#3. 좁고, 딱딱하고, 마니아의 공간

"한번 타볼래요? 100대 한정판 고객님을 위한 특별 서비스."

티타의 제안에 나는 홀린 듯 발 받침대를 딛고 조종석 위로 올라갔다.

"신발은 안 벗어도 되요"

조심스럽게 조종석 시트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생각보다 훨씬 좁았다. 양쪽 허벅지 옆으로 조종스틱과 스로틀 장비가 나를 감쌌다. 정면에는 모니터와 VR 헤드셋이 놓여 있었고, 발 밑에는 묵직한 러더 페달이 솟아 있었다.

마치, 거대한 로봇의 심장 안까지 들어온 것처럼 조종석은 기묘한 안락함이 느껴졌다.

"자, 앞에 놓인 VR 헤드셋 쓰고 시동 겁니다. 시키는대로 하고 놀라지 마요."

티타가 외부에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웅- 윙-

갑자기 의자 밑에서 모터가 구동되는 진동이 엉덩이를 타고 전해졌다. 눈앞의 계기판(MFD) 화면들이 초록색 빛을 뿜으며 켜졌다. 서라운드 스피커에서 쏟아지는 제트 엔진의 날카로운 구동음이 귓가를 때렸다.

#4. 중력을 속이는 기계

"스로틀 밀어요! 풀 애프터버너(Afterburner)!"

나는 왼손으로 스로틀 레버를 끝까지 밀었다. 화면 속 활주로가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콰아아아앙-!

화면 속 전투기 배기구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소리와 동시에, 내 몸이 뒤로 확 젖혀졌다.

"으흑!"

실제로 비행기가 가속할 때 몸이 뒤로 밀리는 G-force(중력가속도)를 흉내 내기 위해, 시뮬레이터 전체가 뒤쪽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헤드셋의 화면과 결합한 내 뇌는 그것을 진짜 가속도로 착각했다.

"이제 조종간을 몸 앞으로 당겨요"

기체가 하늘로 치솟았다. 시트가 덜컹거리며 상승의 진동을 만들어냈다. 선회할 때는 몸이 한쪽으로 쏠렸고, 구름을 뚫고 지나갈 때는 미세한 덜덜거림까지 느껴졌다.

"이런게... 진짜 전투기구나."

나는 눈 아래 펼쳐진 공항과 하늘을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발밑의 진동, 손끝의 저항감, 좁은 칵핏의 냄새. 비행기를 한 번도 조종해 본 적 없는 내가, 지금 이 순간 최초의 VR 전투기 파일럿이 됐다. 어쩌면 두번째로.

#5. 목표가 생겼다

5분 같은 30분이 지났다. 기체가 착륙하고 캐노피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모터가 멈췄다.

"어때요? 할 만해요?"

티타가 씩 웃으며 헤드셋을 벗겨주었다. 잠시 공간감을 잃었는지 다리를 비틀거으며 칵핏에서 내려왔다. 심장이 가쁘게 뛰고 있었다. 방금 겪은 경험의 여운이 너무 강해서, PC방 모니터 풍경이 오히려 가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티타 님."

"네?"

"저거... 얼마나 들었어요?"

내 질문에 티타가 폭소를 터뜨렸다.

"아이고, 벌써부터 눈이 너무 높아지셨네. 일단 세스나부터 띄워보세요. 기초가 탄탄해야 나중에 F-16이든 우주선이든 탈 거 아니에요?"

아까까지만 해도 비싸 보였던 쇼핑백 안의 조종간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건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었다. 극소수만이 사는 조종사의 세계로 가는 '입장권'이었다.

"알겠어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꽤 흥분되네요. 언젠가는..."

나는 뒤를 돌아, 어둠 속에 다시 잠든 괴물을 힐끗 돌아 보았다. 이름이 바이퍼라고 했다. 왜 독사지?

"저 녀석, 언젠가는 제대로 한번 몰아볼게요."

철문이 닫혔다. 내 가슴속 엔진은 이제 막 예열을 시작했다.


 
게시됨 : 06/12/2025 3:3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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